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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조합 귀농인 1호
     좌충우돌 시골 정착기

 [포담마을 표고농장 박영환 대표]

 

​글  전빛이라 /자유기고가

​​​산림지 201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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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밤이 되면  퇴근하는 사람들과 휘황찬란한 네온 사인 불빛이 거리를 메운다. 술로 하루를 달래려는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 도시의 바쁜 밤 거리가 완성된다. 도시라는 캔버스에는 사람과 콘크리트로 밑그림이 그려지고 일과 스트레스라는 물감으로 여유를 덧칠한다. 무릇 은퇴할 나이가 되면 사람들은 사라진 여유를 찾아 나선다. 꽃과 나무에 밴 여유가 좋아지고 산이 그립다. 인간 본연의 유전자는 자연을 그리도록 각인되어 있다. 이 즈음 귀농을 생각하고 귀촌을 떠올리며 그것도 안 되면 귀향을 생각한다. 도시는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과 숨 가쁜 인간관계를 제공해 주지만 삶의 여유는 쉽게 허락하지 않아서다. 그래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늘 자연으로의 회귀 본능이 꿈틀거린다. 산림조합 귀촌인 1호. 그도 로망을 꿈꿨다.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귀농을 준비하다

포담마을 표고농장 박영환(61) 대표는 산림조합에서 근무하다가 은퇴했다. 산림조합에서 정책자금 팀장을 15년간 수행할 정도로 굵직한 보직에 몸 담았고  IMF와 같은 외환위기를 맨몸으로 겪은 베이비붐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 세대의 은퇴는 정부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자영업이 크게 늘어나는 등 경제 상황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귀농귀촌 열풍이 불었던 것도 이 세대의 본격적인 은퇴 시점과  맞물려 있다.

  “막상 은퇴하고 보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이 남았더라고요.  그래서 시골로 가자 했죠. 그런데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 준비도 돼 있지 않았어요.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귀촌은 늘 막연하게 생각만 하는 꿈같은 거니까요.”

쉬운 게 없었다. 로망은 로망일 뿐 도시의 삶에 찌들어 자연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만 가지고 귀촌은 그림의 떡이었다.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갔다. 우선,귀농귀촌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박 대표는 귀농운동본부 주관으로 운영되는 귀농학교에 입학했다. 석 달을 다니면서 다양한 연령층, 다양한 직업군의 동기들을 만났다. 주말에는 동기들과 귀농 선배들의 귀농지 투어를 다녔다. 모두 다양한 모습으로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모방이라도 할까 했다. 그러나 처한 환경이 다르다 보니 모방조차 쉽지 않았다. 고민은 깊어만 갔다. 부인 전종희 씨는 귀촌을 탐탁지 않아 했다. 혼자 내려가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쉽지 않았지만, 우선 아내를 설득했다. 그리고 같이 고민했다. 조금씩 수가 보였다. 그래도 몇십 년을 산림조합에 몸담았고, 전공도 임학이었던 박 대표는 버섯을 생각해냈다. 후배들이 근무하고 있는 여주 산림버섯연구센터에 상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표고버섯 재배를 시작하게 됐다. 모르는 게 생기면 언제든 연구센터로 뛰어가야 하니 귀촌 장소도 자연스레 근처인 강원도 원주 자락에 잡았다.

귀촌 준비로 바쁜 일상에서도 정해둔 원칙이 있었다. ‘우리의 삶을 찾자’였다.

시작은 하우스 4동, 배지 기준 3만 6000개였다. 수확 첫해부터 양이 제법 나왔다. 기분 좋게 표고버섯을 땄다. 그런데 한 번 따고 나면 또 자라고, 또 자라고… 시간마다 자랐다. 고품질의 표고버섯을 수확하려면 갓이 벌어지기 전에 따야 하므로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수확할 시기를 놓치면 상품성에 따른 가격 차가 너무 컸다. 

 결국 이동식 주택을 가져다 놓고 눈만 잠깐씩 붙이며 종일 버섯을 수확했다.

“처음엔 동네 할머니들의 일손을 빌렸어요. 그런데 때마다 간식하고, 밥하느라 오히려 숙련공인 아내가 부엌일을 하고, 손이 느린 할머니들이 버섯을 따고 있는 거예요. 비효율적이었어요. 그래서 둘이 하자 결심했어요. 정말 죽어라 일했죠.”

워라벨을 위해 여름엔 노동, 겨울엔 여행

표고버섯은 판매가 잘됐다. 2010년에 귀촌한 부부는 2011년 쏠쏠한 매출을 기록했다. 그러나 행복한 비명도 잠시. 어느 순간 쉼 없이 일만 하는 부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귀촌을 결심하면서 정해둔 원칙인 ‘우리의 삶’은 없고 ‘일’만 있었다.

“몇 년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아, 우리가 놀면서, 쉬면서 평생 일하자고 시작한 버섯농사인데 너무 일만 하고 있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양을 줄이고 봄부터 가을까지만 일하고 겨울엔 쉬기로 했어요. 인생의 초점을 ‘삶’으로 결정한 순간이었죠.”

부부는 재배 면적을 줄인 이후부터 겨울이 되면 여행을 떠났다. 따뜻한 제주도에 가서 한 달간 살고 오기도 했다. 힘든 일을 하기 위한 일종의 프로모션이었다. 해외여행하기. 목표는 50개국 100개 도시다. 벌써 그 목표의 반은 이뤘다. 처음 계획했던 그 삶이다.

부부는 지난해부터 겨울 재배를 시작했다. 기후변화로 해마다 여름이 길어지면서 버섯사 냉방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버섯은 고온에 약하다. 공조(air conditioning) 시설이 아닌 이상, 비닐하우스는 냉방시설을 해봤자 일정 온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부부는 겨울 재배 품종을 생각해냈다. 지난해부터는 1만 개는 여름에, 2만 개는 겨울에 생산하고 있다.

“산이 안 움직이면 내가 움직이는 수밖에요. 2016년에는 한동안 시범재배를 해봤어요. 그런데 괜찮더라고요. 밤에는 15~18도만 맞춰주면 되니까요. 난방시설로 하우스 온도를 약간 올리는 건 쉬워요. 낮엔 지붕을 열어 태양열이 들어와 따로 난방을 안 해도 온도가 맞고요.”

그러나 혹시 모를 재고 문제를 위해 당분간 1만 개는 여름 재배를 유지할 생각이다. 지금은 겨울 재배와 여름 재배를 비교하며 어느 쪽이 더 유리한지를 고민하고 있다.

실제 가락시장에 내는 물량은 주로 학교급식 재료로 나가는데 학교가 방학하면 판매 물량이 줄어든다. 1월 한 달간 급식 물량이 줄어드는 대신 군납 식자재라는 판로를 개척해서 한시름 놨지만, 그래도 겨울 재배는 아직 위험성이 있다는 생각이다. 임업은 언제나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겨울 재배만 하고 싶어도 당분간은 계절을 분산해 3만 개 생산을 유지할 계획이에요. 이것도 규모의 경제니까요. 우리가 버섯 재배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버섯 가격이 좋았어요. 그런데 아주 서서히 떨어지고 있는 모습이에요. 당시 평균 1만 원이었다면 지금은 6000원 선이거든요. 느타리버섯 시장은 이미 죽었고, 팽이버섯은 공장화돼 몇백 원대에 불과해요. 그나마 표고버섯이니까 이 정도 살아남은 거예요.”

생산량의 50%는 직거래, 유통은 다변화

부부의 노동력만으로 생산할 수 있는 양만 재배하다 보니 전량 도매시장에 출하하면 이익 창출이 힘들다. 고품질의 버섯을 적정가에 거래해야 수익을 맞출 수 있다. 그러려면 직거래가 필요하다. 배지를 이용해 표고버섯을 재배할 경우 대부분 중국산을 사용하지만 박 대표 부부는 산림조합을 통해 국내산 배지를 구입해 사용한다. 이 같은 이유로 최소 50%는 직거래로 판매하고 있다. 남는 물량은 농협 계통출하로 낸다. 유통 다변화를 꾀한 셈이다.직거래는 학교급식과 이 지역에 귀촌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든 더불어살림협동조합을 통해 판매된다. 부부의 표고버섯 품질을 알아본 전통시장 판매자가 전량 제값으로 가져가고 등외품 역시 전통시장에서 판매하며 대부분 물량을 해소한다. 알음알음 전화로 주문을 해오는 경우도 많다. 개인 직거래는 명절선물로 가장 많이 나간다. 인터넷 판매는 수년째 고민만 하고 있다. 대량생산이 아니다 보니 불특정 다수의 요구사항을 모두 받아주기 힘들기 때문이다.

“매뉴얼대로 되는 것은 없다”

 

표고버섯 재배 방법은 모두 배운 대로였다. 그러나 정작 일은 매뉴얼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농장마다, 지역마다 조건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결국 경험의 축적만이 정확한 나만의 매뉴얼을 만들 수 있는 토양이 된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보완되고, 또 보완되는 식이다. 예를 들어 비닐하우스의 수명은 10년이지만 최근에는 산성비 등 때문에 5년이면 비닐을 교체해야 한다.

박 대표는 귀농귀촌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보탠다. “농사는 절대 우습게 생각하면 안 돼요. 창업한다는 생각으로 철저하고 치밀하게 준비해야 해요. ‘농사나 지어볼까’ 하는 생각은 스스로 레드오션을 만드는 거예요. 어떤 작목을 하더라도 말 그대로 ‘꾼’이 돼야 하죠.”

시골에 정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텃세는 여전하다. 사실 텃새를 부리는 것도 인간의 본능이다. 새로운 것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텃세를 극복하는 일부터가 귀촌의 성공 열쇠가 된다. 이건 매뉴얼조차 없다.

“이곳에 오니 원시경제로 돌아갔어요. 물물교환이죠. 무조건 인사하고 베풀어라. 그렇게 8년을 지냈어요. 농촌 인심이라는 게 각박해졌다지만 더하면 곱으로 돌아오는 게 시골이에요. 가장 좋은 버섯을 골라 명절 때마다 선물하면 많이들 좋아하시고 또 베풀어 주세요. 또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정착하는 곳과 경합하는 작목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위해”

결혼 35년 차. 부부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결혼했지만 귀촌하기 전까진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 정도로 바쁘게 살아왔다. 지금은 바쁜 일상 속에 한두 시간 여유를 찾아 자연을 바라보며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 부부의 고민은 억대 연봉의 농부도 아니고, 강소농도 아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늙어갈 것인가가 고민이다.

“어느 작가가 수필집에서 말하더라고요. 올해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트렌드라고요. 겨울에 철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아름답다 느끼는 감정, 그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그런 삶이 저희 부부의 목표가 됐어요.”

귀촌하고 보니 주위에 숨어 있는 능력자들이 많았다. 화가부터 시작해 은퇴한 가수, 교수 등. 최근에 전씨는 이웃의 재능기부로 캘리그래피를 배우고 있다.보통 도시에서 문화생활을 쉽게 즐길 수 있다고 여기지만 시골이야말로 진정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무엇보다 귀촌하는 과정에서 부부가 발견한 행복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진솔한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을 알아가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됐다. 이미 이 부부는 목표를 이뤘는지도 모르겠다.

문의 : 010-9023-3708(박영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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